청암사 소개

불영산의 푸르른 정기로 둘러 싸여진 청암사靑巖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로 신라 헌안왕3년(859) 도선국사가 건립한 고찰(古刹)입니다.

사적에 따르면 조선 인조 25년(1647) 화재로 전소(全燒)되었으나 벽암(碧巖)각성(覺性)스님이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문도(門徒) 허정(虛靜)혜원(慧遠)스님으로 하여금 재건토록 하였으며, 이에 혜원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청암사를 중창하였습니다.

그 후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가 서인으로 있을 때 청암사 극락전에서 특별기도를 올린 인연으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불영산의 적송산림은 국가보호림으로 지정되어 궁(宮)에서 무기 등이 하사되었고 조선시대말기까지 상궁(尙宮)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고종 9년(1905) 주지 대운당스님이 잠결에 빨간 주머니를 얻는 꿈을 꾼 후 한양에 가니, 어느 노보살님이 자신이 죽은 후에 염불을 부탁하며 대시주를 하였습니다. 대운당스님은 이렇게 쇠락한 극락전을 중건하고 염불 만일회(萬日會)를 결성하였으며 극락전에서는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염불당으로서 역할을 다했다고 합니다.

청암사승가대학은 벽암각성의 강맥을 이은 대화엄 종장 모운진언(暮雲震言, 1622-1703)이 청암사를 전문 강원으로 개설한 것이 효시이다. 그 이후로 허정 혜원(虛靜慧遠)이 강교(講敎)와 설선(設禪)의 꽃을 피웠으며, 1711년경 조선시대 벽암 각성, 모운 진언, 보광 원민조사의 법맥을 이은 화엄학의 대강백 회암 정혜(晦庵定慧, 1685-1741)조사는 청암사 강원을 융창 발전시킨 대강백이다.

그 당시 청암사는 불교 강원(講院)으로서의 명성을 드날렸으며, 운집한 학인수는 300명이 넘었고 승속의 추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 수많은 제자들로 면면히 이어져 근래 고봉(高峰)스님과 그의 제자 우룡스님, 고산스님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청암사승가대학 학장이신 의정지형강백과 의진상덕강백은 1987년 3월 25일 청암사비구니승가대학을 설립하여 20년에 걸쳐 전 도량 및 부속건물을 보수Ÿ신축하고, 목조로 된 사십이수(四十二手) 관음보살상을 새로 조성하여 모셨으며, 범종각을 신축하는 등 후학양성에 원대한 발원을 불사에 펼쳤습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경관 속에 고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통강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청암사는 대중스님들이 부처님 경전공부와 더불어 수행의 향기를 쌓아가고 있는 곳입니다.

청암사 연혁

해발 1,317m의 불령산에 위치한 청암사 가람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2길 335-48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 말사로서 신라 헌안왕 3(859)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유서 깊은 천년고찰입니다.

청암사 창건 당시에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 개조인 慧哲(785-861) 조사가 머물렀다고 하며,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사적비에는 조선시대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청암사의 지금 모습이 있기까지 다음과 같이 모두 5차례의 중창이 있었습니다.

제 1 중창기

먼저 조선 중기에 율사 의룡(義龍)이 중창했다고 하며, 그 후 1647년(인조 25) 화재로 모두 소실되자
벽암각성 화상(1575-1660)이 덕유산 구천동에서 門人 칠백 명과 함께 계셨는데,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 문도인 허정혜원과 반운지선조사를 보내셨습니다.

반운지선(伴雲 智僊)조사는 쌍계사(증산면 옥동) 창신을 주관하였고 허정혜원조사는
청암사를 재건토록 했는데 이것이 제 1차 중창입니다.

이후 1660년경에 명승(明勝) 선원과 강원을 설립한 후로부터 청암사 강원은 선장(禪匠)과 강백이 다투어
講敎와 說禪의 꽃을 피웠으며, 그 후 丈室 등이 쇠락한 것을 벽암의 손자 보광 원민조사(1680년경)가
복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제 2 중창기

1736년(영조 12, 병진)에 門樓가 물사태를 당한 것을 보광의 고족(高足: 높은 제자)인
회암 정혜(晦庵定慧)조사가 중수하였으며, 그 당시 강설의 법석을 더욱 진작시켜
운집한 학인의 수가 3백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제 3 중창기

1761년(조선 영조 37, 신사) 회암의 제자인 모암 체규조사가 법당 및 장실을 중수하였고,
1781년(정조5 신축)에 이르러 법당 지장존상이 물 사태에 상처를 입은 것을 회암 정혜(晦庵定慧)조사의
4대 법손인 환우 연찬(喚愚 演贊)조사가 施主募緣을 해서 중수하는 한편 주불 및 탱화 등을 一新하였습니다.

그 다음해인 1782년(정조6, 임인) 4월에 다시 화재를 입어 법당‧영감(影龕)‧丈室‧ 중료(衆寮)인
六和寮‧ 門樓‧익랑(翼廊) 등이 모두 재가 된 것을 환우 대사께서 慕庵조사가 만든 권선문으로
모연하는 등 여러 대중과 인화 단결하여 익년(1783) 가을부터 복구작업을 시작하여 신궁보전(新宮寶殿)과
누당(樓堂)을 중건하고 육화료를 보수하였는데 이를 제 3차 중창이라 합니다.

1852년 회암조사의 5대 법손인 포봉 일오조사가 회암 진영을 봉안하기 위해 회당영각(晦堂影閣)을 지었으나
화재로 전소되고, 후에 대운병택(大雲丙澤)조사가 지금의 진영각을 신축하고 진영을 모시어 현재 22분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본 진영은 직지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 4 중창기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어려운 시대적 상황에 청암사 역시 1897년 무렵부터 거의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5년(고종 9, 을사)에 주지 용각화상이 극락전을 중건하고 대운병택조사(1868-1936)가 극락전을 복원하면서
다시 절을 세웠습니다.

이듬해에 응운영호(應雲永護)화상이 보광전을 건립하던 중 입적하자 대운(大雲)화상이 완공한 뒤,
가야산 동쪽의 성주 수륜면 용기사터에서 42수 청동관세음보살상을 이운하여 보광전에 봉안하고
萬日會를 결성하여 극락전은 염불당으로서 염불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신행의 전법 불사를 진작시키었습니다.

그러나 보수를 끝낸 지 6년만인 1911년 9월 21일 밤 청암사는 원인모를 화재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대운 병택(大雲丙澤)조사가 그 다음 해인 1912년 봄에 현존하는 전각 대웅전과 육화료·진영각을 신축하고,
1921년에는 중국 항주 영은사에서 목조 석가모니불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는 제 4차 중창을 이루었습니다.

제 5 중창기

이후 청암사는 많은 쇠락과 함께 주민마저 외면하는 쓸쓸한 사찰로 방치되어 있다가,
1987년 3월 25일 비구니 의정 지형(義淨志炯)강백과 의진 상덕(義眞相德)강백이 청암사 최초로
비구니 승가대학을 설립하고 도난당한 청동 42수 관세음보살상을 대신하여 목조 42수 관세음보살상을
보광전에 조성 봉안하였으며, 대웅전‧ 육화료‧ 진영각‧ 보광전‧ 극락전‧ 정법루 등을 보수하고,
사천왕문과 일주문 이전을 비롯하여 회암 비각과 대운당 비각 보수 및 부속 건물인 중현당‧ 선열당을
신축하였으며, 1993년에는 극락전 중수, 1997년 범종각 신축 및 1999년 보광전 보수를 비롯하여
이후 백화당‧ 자양전 신축 등 대대적인 불사를 거쳐 지금과 같은 교육도량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니
이것이 제 5차 중창으로 200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일 청암사 제5차 중창 20년불사회향 및 청암사승가대학 제1회 ~ 20회까지의
총졸업식을 거행하였습니다.

2007년 4월 18일에는 교육전문기관인 청암사 율학승가대학원을 개원하였습니다.